항일 독립운동가 ‘김철수 ㆍ장현식’ 선생 유적 답사기

항일 독립운동가 ‘김철수 ㆍ장현식’ 선생 유적 답사기

김연탁 (전북노동연대 사무처장)

아래로부터 전북노동연대는 지난 5월 10일 열린 5월 운영위원회에서 5월 월례강좌를 대신하여 6월 1일 진행되는 공공운소노조 전북본부 역사기행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일독립운동가인 장현식 선생과 김철수 선생의 공적을 기억하고, 치열했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김철수 선생은 여러 서책에서 접하기도 하고, 어렸을 때 아주 우연하게 한 번 스치듯 뵌 적이 있어서 익숙했지만, 장현식 선생은 생소한 분이었다.

지운 김철수 선생

독립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온 몸을 바치신 분들이 역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은 드문 사례가 아니다. 하지만, 고난과 고통의 길을 치열하게 살아가신 선배들을 추모하고, 그 분들의 뜻을 본받는 것은 시공을 뛰어넘어 후배들의 당연한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석자는 평등지부 조합원들이 대다수였지만, 조합원들의 아이 수 명도 참여했다. 안내는 최우영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사무처장이 맡았다. 원래 안내를 하기로 했던 윤상원교수가 급한 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갑자기 맡게 되었다고 했다.

먼저 우리는 한옥마을에 있는 전통문화연수원에 갔다. 전통문화연수원 건물 중 바깥채가 일손 정현식 선생의 생가건물이다. 1932년에 지어진 금구 서도리에 있는 생가를 후손의 기증으로 2009년에 전주시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장현식 선생의 큰 가세는 학독이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일송 장현식 선생

장현식 선생은 ‘노블레스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석꾼으로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대동단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혀에 대못을 박히는 고문으로 말더듬이가 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6.25 전쟁당시 김일성의‘남한 요인 모셔오기’ 작전으로 인해 납북되어,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채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많은 이들은 외면하였고, 김철수 선생만 유일하게 장현식 선생 집안과의 교류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문화연수원의 다른 건물들에 읽힌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금구 서도리로 향했다.

차 속에서 안내자는 역사바로세우기 현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총 2,3백만명이고, 그 과정에서 2,30만명이 사망하였으나,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숫자는 15,511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정부의 노력은 형식에 불과하다는 발언이었다. 우리는 금구에서 장현식선생의 종조부(막내할아버지)인 장태수선생의 사당 ‘서강사’를 먼 언저리에서 보았으며, 생가터‘남강정사’를 둘러보았다. 장태수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이를 비관하여 27일동안 단식 끝에 스스로 남강정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일제는 장태수선생을 기리는 사당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과 후손은 장태수선생의 신위를 중앙이 아니라 옆에 배치하여 사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장태수 선생의 순국은 장현식선생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장현식 선생의 생가터를 방문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였고, 그 곳이 생가라는 아무런 증거를 확인하지 못한 채 콩밭만 보고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도장씨 집성촌이라는 서도마을은 이주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 대한 핍박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동네를 떠난 결과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남강정사 전경, 경술국치를 비관하던 구한말 관료 장태수 선생은 이 곳에서 27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우리는 화호 구마모토 농장 입구에 있는 정자에서 노조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구마모토는 전북지역에 다섯 군데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화호의 옛지명은‘숙구지’로 개가 자는 모양을 뜻한다. 구마모토는 일본에서 마름을 통해 농장을 경영했으며, 소작료가 전국평균이 30%인데 비해, 평균 45%, 최고 75%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소작료 기준을 가장 소출이 높은 논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경쟁을 통해 소출량을 가장 많이 늘린 소작농에게는 혜택을 주었지만, 다른 소작농에게는 더 많은 소작료를 착취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전북지역에서는 소작쟁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소작쟁의는 1924년 전북민중운동노동자동맹의 결성으로 이어지고, 1925년 조직적으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마모토는 일본제국주의의 패전에도 이미 논을 담보로 돈을 있는 힘껏 대출하여 재산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백산고를 들러 김철수 선생 추모비를 둘러보고, 야외 교정에서 김철수선생의 행적에 대해 들었다. 김철수선생의 추모비는 백산고 설립자인 정진석 선생이 우익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설득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김철수 선생은 초기 공산주의자로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하신 분이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천수를 다 누린 공산주의자이다. 하지만, 그 생애는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선생은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 유학을 계기로 항일운동과 반제국주의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6월 사회혁명당 조직을 계기로 1921년 고려공산당(상해파) 창당, 1925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1930년 2월 체포된 이후, 해방 이후인 1945년 8월 17일에야 출옥하게 된다. 해방 이후 박헌영과의 갈등과 대립, 여운형의 암살 이후 1947년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낙향한다. 1968년 선산이 있던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에 10평짜리 초가집에 이안실(:이정도면 편안하다)이라 이름 짓고 칩거하다 1986년에 생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가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분단, 전쟁을 겪으며 철저하게 희생되었고, 장남과는 의절하였다. 김철수 선생을 모시던 막내딸과 손자와의 불화 등 가정사가 원만하지 않았다. 김철수 선생은 1980년대 초반 책을 내겠다며 찾아온 이들에게 많은 자료를 내어주었으나, 그 자료는 다시는 세상에서 볼 수 없었다. 이들은 안기부 요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칩거하다 생을 마치신 이안실을 답사하였다. 그 곳은 원래 선생 집안의 선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손자가 그 선산을 팔았다고 한다. 그 곳은 태양광집열판단지가 들어섰고, 이안실은 훼손을 막기 위해 천막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전형적인 세 칸짜리 오두막 초가집이었다. 너무 좁고 낡아 가슴이 아팠다. 한 평생을 일신의 안위가 아닌 조국의 독립과 함께 잘사는 세상을 위해 투쟁하셨는데, 말년에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와세다 대학교까지 졸업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을텐데,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출세하실 수 있었을텐데, 일생을 후회하지 않으셨을까?

2004년 건립된 김철수 선생 추모비. 김철수 선생은 공산주의 운동경력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못하다가,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나는 김철수 선생을 뵌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 1983년이었다. 당시 우리 담임이 아팠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다른 반에 몇 명씩 배치되어 곁방살이를 하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예수병원에 문병도 갔었고, 담임이 퇴원한 후에는 집이 있는 백산에도 갔다. 백산에 갔었을 때, 길에서 선생을 마주쳤고, 담임이 인사드리라고 해서 아이들과 함께 인사를 드렸다. 그 오랜 기억을 잊지 않은 것은 흔치 않는 이름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성함이 ‘철수’라니.

역사기행을 주관한 적도 많고, 참여한 적도 많다. 하지만, 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동안에는 4·3항쟁, 갑오농민전쟁, 태백산맥, 아리랑, 일제강점기, 빨치산, 전태일, 노동자대투쟁, 백제,가야 등 시대적이고 서사적인 주제로 진행했으며, 역사기행 안에 그 주제를 모두 담기 위해 무리한 일정이 수반되었다. 무리하지 않는 여유있는 일정. 건물이나 사적보다는 길. 다소 덜 알려진 인물을 중심으로 무게를 뺀 가벼운 산책같은 스토리가 특색이었다. 참석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준비가 철저해야만 시간낭비를 줄이고 효율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내 기존의‘관념’이었다. 하지만, 이번 역사기행에서 느낀 점은 과정과 일정의 치밀함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참석자들이‘역사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임을 느꼈다는 것이다. 참 유익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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