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자 회원을 만나다

[회원 인터뷰]

김기자 회원을 만나다

인터뷰: 김연탁 사무처장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 29일 오후 세시에 민주노총전북본부 사무실에서 김기자 민주노총전북본부 수석부본부장을 만났습니다. 투박하면서도 포근한 동네 누나같은 외모에서는 삼십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운동가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으나, 인터뷰에 들어가자 연륜과 경험, 노동해방에 대한 강렬한 의지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기자 회원은 1987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여 대전을 거쳐 2010년 전북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귀농이 목적이었지만, 인천에서 인연을 맺은 한 지인의 전화를 계기로 2012년 다시 노동운동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상은 인터뷰 내용을 축약한 것입니다.

명성전자 위원장과 인노협 활동시절 (1987∼1995년 7월)

1.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약력

87년 투쟁정세 속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현장에 투신한 활동가가 “노동해방이 곧 올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노동해방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당시 다니던 회사(캥거루 구두약 생산)를 그만두고, 87년 7월에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명성전자에 입사하였다. 명성전자에는 활동가들이 있었고, 서로 논의하여 88년 8월에 노조를 설립하였다. 91년까지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약칭,‘인노협’) 사무처장을 겸직하였다. 92년 의장의 구속으로 의장직무대행을 역임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인노협 지도위원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문화국장과 산안국장으로 95년 7월까지 활동하였다. 위원장 임기중 전노협 결성을 앞두고 경찰의 표적수사에 걸려 90년 1월 구속되어서 3개월동안 투옥되었다. 이후, 회사측으로부터 해고되었고, 소송을 통해 복직판결을 받았으나, 회사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여서 실질적으로 복직하지는 못했다.

인천활동 시절 연대방문 중인 김기자 전 명성전자노조 위원장. 맨 왼쪽 (사진: 김기자 제공)

2. 가장 기억나는 투쟁

89년 인천지역 전자업종 사업장 20여개가 대책위를 구성하여 진행한 공동임투가 가장 기억이 남는다. 당시 업종협의회 대표를 맡아서 공동임투를 주도하였다. 일괄적으로 시급 2,487원을 요구하여 공동타결을 목적으로 투쟁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업장들은 87년에 노조가 설립되어서 명성전자와 임금차이가 컸다. 당시 회사측은 2,480원을 주장하였다. 회사측의 의도는 공동임투를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대표 사업장이라 양보할 수 없었다. 마지막 교섭이 결렬되고 파업이 임박했을 때, 회사측이 마지막으로 교섭을 하자고 요청했다. 당시 간부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가부만 묻고 교섭장을 나오는 것으로 설득하여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회사측에서 5분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위원장 재량으로 승낙했고, 결국 요구안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교섭위원들이 결정사항을 위반했다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공개사과하고, 위원장을 물러나려고 했으나, 조합원들이 공개사과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여 위원장 직위는 유지하였다. 민주노조를 절실히 깨닫는 계기였다.

3. 활동중 후회되는 일

인노협 사무처장 시절에 다우정밀이라는 회사가 노조를 만들어 장기파업에 돌입하였다. 온갖 협박과 설득에도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력 투입이 임박했다.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꽃병을 제조하여 바리케이트에 잘 보이도록 쌓아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경찰력은 제조를 명분으로 침탈하였고, 조합원 70여명중 15명이 구속되었고, 사업장은 직장폐쇄했다. 투쟁지도를 잘 못한 책임이다. 또 한가지는 당시 막 시작되었던 소사장제에 대해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만 보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명성노조 바로 옆 이웃노조였던 대양 노조의 명성노조탄압에 대한
연대투쟁 유인물 (사진: 김기자 제공)

4.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정리하게 된 계기

명성전자가 중국으로 이전한 뒤, 3년 이상 상급단체 활동만 하였다. 그러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또, 활동하면서 생활이 많이 어려웠다. 그래서, 대전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고, 회사를 다녔다. 당시, 대전은 노동운동이 가장 열악한 곳이어서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혼자 집회 참석하는 식으로 활동했다. 노조도 없이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다보니, 노동해방의 의지는 더욱 절실해졌다.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 전북지부와 민주노총전북본부 활동 (2010년∼2019년)

5. 전북지역에 정착하게 된 계기.

대전에서 함께 살던 동지의 아이가 취학연령이 되어서 학교를 찾아보게 되며 진보교육감의 교육정책을 비교하였는데, 김승환 교육감의 정책이 제일 좋았다. 그래서, 전북지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고, 우연히 정읍 수곡초등학교를 갔는데, 아이가 학교가 너무 좋다고 하기에 정읍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귀농이 목적이었다.

6. 교육공무직 전북지부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

2012년 9월에 인천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전회련 전북지부가 전임자가 없어서 힘드니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술김에 그러겠다고 했다. 내심 ‘한 1년 정도이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7년을 일했다.

7. 교육공무직투쟁에서 가장 기억나는 일과 후회되는 일

활동을 시작한 지 두달이 되던 2012년 11월에 첫 파업이 있었다. 당시, 학교비정규직의 고용주체가 학교장에서 교육감으로 이관되는 중에 많은 비정규직이 해고의 위험에 시달렸다. 그래서 교육공무직전북지부는 독자적으로 1. 인원감축없는 직고용, 2. 정년 58세에서 60세로 연장, 3. 급식실 위험수당 신설을 요구하며 파업선언을 하였다. 당시는 SNS도 활성화되지 않아 파업참가자 파악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최소 10명만 참석해도 파업출정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일 150여명의 조합원이 파업을 선언하고 출정식에 참가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출정식 중에 공공운수노조와 민주노총전북본부와 함께 교육감 면담을 진행하였고, 모든 요구사항을 관철했다. 1차파업의 성공이 교육공무직 전북지부의 기틀을 확고하게 한 계기였으며,‘투쟁 없이 쟁취없다.’는 교훈을 조합원들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1차파업에 참여한 150명의 조합원이 교육공무직 전북지부의 핵심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회되는 일보다는 아픈 손가락이라는 표현이 맞는데, 영전강, 스포츠강사 등 무기계약직이 안된 조합원들이다. 아쉽다.

8. 민주노총전북본부 수석부본부장을 결의한 결정적인 계기

2019년 3월, 교육공무직 활동을 정리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석부본부장 제안이 왔다. 썩 내키지는 않았는데, 5인미만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1-2인 사업장 조합원들을 노조가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며, 민주노총이 미조직 영세 소수사업장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9. 전북지역 운동에 대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점

첫째, 회의에서 말이 없는 것. 실천력 담보를 위해서는 논쟁과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둘째, 회의 또는 집회가 노동자집회답지 않고 긴장감이 없다.
셋째, 운동공간에서는 정파가 치열하게 논쟁하더라도, 대중조직에서는 단결하였으면 한다.

10. 노동연대에 바라는 점

노동연대가 자랑스러웠던 적은 촛불투쟁때 팜플렛을 제작하여 선도적으로 시민들에게 선전전할 때였다. 노동연대가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논의를 보다 활성화하였으면 한다. 전체모임이 어렵다면, 해당분야별, 지역별로 모임을 하여 의견을 집약시키고, 입장으로 정리하길 바란다.

11. 마지막으로 노동연대 또는 민주노총전북본부 조합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

노동연대는 지역의 내용적 길라잡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민주노총은 반드시 지켜내고 성장시켜가야 할 내 얼굴같은 조직이라고 생각하는 조합원과 간부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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