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평전, 다시 읽기”

“김남주평전, 다시 읽기”

김연탁 (전북노동연대 사무처장)

0. 서문

나는 김남주를 좋아한다. 연기자 김남주도 좋아하고, 에이핑크 김남주도 좋아한다. 인터넷에 성형전후의 사진이 유포되었을 때,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성형을 인정하고, 돌싱남 김승우와 결혼하는 김남주의 당당함이 멋있어 보였다. 정은지라는 뛰어난 메인보컬이 있음에도 비교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각종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르며, 성형과 대학입학 특혜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도 숨지 않고 당당히 활동하는 김남주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시인이자 전사인 김남주이다. 사랑, 자주 민주 통일, 노동해방을 노래하면서도,‘인간을 착취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투쟁의지를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한 치도 굴복하지 않았다. 자본과 권력에 타협하는 시인과 민족주의자들, 결국 종교는 자본과 정권에 복무하는 기관일 뿐이라고 일갈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당당함이 역시 멋있다.

김남주평전, 강대석, 시대의창, 2017

문재인정부의 행보가 15년 전 참여정부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불과 몇 년도 못 되어 역사가 다시금 수구세력이 주도하는 반동의 시대로 역주행하고 있다.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도 형집행정지를 신청한다고 한다. 참 못났다. 지들의 능력과 힘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거져 거머쥐었음에도 이조차 지키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에 한숨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이 땅의 지배세력은 수구반동세력이지만, 현재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자유주의 세력’은‘초록은 동색’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 잘 잡는 놈이 장땡이다.‘고 이윤창출을 위해서는 자기들도 수구반동세력만큼 할 수 있다고 과시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호가호위(虎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라고, 노동자민중을 등에 업지 않는 자유주의세력을 누가 인정할까? 자본은 써먹을 때까지 써먹고 버리면 그만인 것을.

자유주의세력의 우경화에 대해 노동자민중운동은 좀처럼 새로운 파열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답답하다. 2016년과 2017년을 밝혔던 촛불항쟁의 성과가 그대로 사멸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요즘, 자주 찾게 되는 노래가 나윤선이 부른‘사의찬미’와 김필과 김창완이 함께 부른‘청춘’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어 집어든 책이 김남주 평전이다.

1. 시는 구라다. 시인은 구라장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썼는가 보다. 초등학교때부터 백일장대회 단골 참석자였다. 대회 전에는 다른 애들 하교 후에도 남아서 준비하는 것이 짜증나기도 했지만, 수업시간에 수업 빼먹는 것으로 보상이 되었다. 그리고, 교외 백일장대회 때에는 인솔하시는 선생님이 짜장면도 사주었다. 그래서, 시를 많이 접하고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신기하리만치 시를 잘 외웠다. 초 ․ 중학교시절 시를 암기하는 것이 단골 숙제였다. 그렇게 큰 노력이 없었는데도, 교과서에 나온 시를 모두 외워서 수업시간에 큰 박수를 받았다. 나에게 시는 색색들이 아름다운 언어를 재료로 지은 간결하고 아름다운 집이었고, 마치 그 집마다 제각각의 사연과 의미를 담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와 시인과의 사랑은 중학교 때‘국사’를 배우며 철저히 깨졌다. 내가 사랑했던 시인들 대부분이 일본에 부역하며, 현실을 도외시한 쓰레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쓰레기 더미들에서 건져낸 사람들이 이육사, 윤동주, 신석정, 김영랑 등 몇 명 있었지만, 헤어진 연인을 대하듯, 그 후로 시에 대한 절절함은 느낄 수 없었다.

2. 김남주 시인을 처음 만난 날

내가 김남주 시인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89년 6월 말로 기억한다. 전교조 결성과 이에 대한 파장으로 학교 안팎이 시끄러웠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선생님들이 대거 전교조에 가입하였다. 선생님 두 분이 결성식에서 경찰에 연행되었고,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님들이 해직될거라는 흉흉한 소리가 들렸고, 학생회를 중심으로 선생님들을 도울 방법들을 고민하였다. 반 전교조 성향 교사들의 수업은 학생들의 태업으로 거부되고 자습으로 대체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의 수업은 탄압과 거취를 묻는 학생들의 질문에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했다. 아침에 등교하면, 교실 칠판에는 각종 민중가요와 투쟁가, 시가 칠판에 적혀있고, 선생님들에게 응원의 편지 보내기. 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 이를 넘어서서 고등학생 궐기를 호소하는 조잡한 선전물들이 배포되고, 입으로는 “누가 탈퇴했다더라, 누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누가 교감과 교련에게 린치를 당했다더라.”는 소식이 매일 들려왔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이 임박했을 때, 선생님 세 분이 결국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한 분은 간염으로 병가 중에 학교를 그만두셨고, 두 분은 해직되었다. 그 중 한 분이 미술선생님이었다. 그 때 당시 남고 선생이 다 그렇듯 미술선생님도 때렸다. 하지만, 때리다가 자기 분에 못 이겨 닥치는 대로 때리는 말종은 아니었기에, 맞더라도 불만을 토로하거나 덤비는 학생은 없었다. 유머도 있었다. 1학년때부터 미술을 담당하였는데, 첫 시간에 자기 이름을 다음시간까지 꼭 외워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세원에서 한 글자만 다르다고 했다. 그 때 시절에는 내가 4차원이었던 같다. 미술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그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머니 얼굴을 그렸다. 그런데, 어머니 얼굴이 잘 안 그려졌다. 지우고, 찢고를 반복하다가 마침 만화영화 주인공 하니를 모델로 한 과자봉지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하니를 그려서 제출하였다. 선생님은 미술시간에 채점을 하시면서“특징을 잡아 잘 그렸는데, 실존인물이 아니니 5점을 감점한다.”고 했다. 내 학창시절을 통틀어 제일 잘 맞은 미술점수였던 것 같다.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에서 이 시를 낭독하여주었다. 그 시가 김남주 시인의 「사랑은」이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 불모의 땅을 파헤쳐 /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 봄의 언덕에 /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 사과 하나 둘로 쪼개 / 나눠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 한 별을 우러러보며.

 

3. 활동가로서의 삶의 좌표가 된 김남주 시인의‘전사’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입학하였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동아리를 조용히 탐색하였다. 학번별 위계질서가 확실한 곳, 너무 크고 대중적인 곳이 아닌 학술동아리 위주로 알아보았다. 학창시절 인연이 있던 고등학교 선배와 동창들, 과 선배들, 각종 인맥들을 이용하여 자기 동아리로 데려가려고 찾아오기도 했으나 모두 거부하고 내가 가입한 동아리는 철학동아리였다. 만들어진지 일 년밖에 안 되었고, 그래서 선배들도 많지 않았고, 회원들이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이지 않아서 혼자 책 읽기 딱 좋았다. 매일 아침 8시도 안되어 학생회관 앞에 쌓여있는 신문 하나 들고, 자판기 커피 한잔 빼서 5층 동아리방으로 출근하였다. 그리고, 거의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동아리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동아리는 동아리 선배들 대부분이 총학생회 간부였던 가장 강성의 이념서클이었고,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여유로운 시간은 끝나고, 운동권 학생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동아리에서 창문을 통해 아래를 바라보면 보이는 곳이 인문대학이고, 학생회관에서 인문대까지 넓고 큰 길이 보였다. 우리는 그 곳을 녹두광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길에는 이광웅 시인의‘목숨을 걸고’라는 시가 붓글씨로 써 있었다.

이 땅에서 /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 목숨을 걸고…

그리고, 우리 동아리 한쪽 벽면에는 김남주 시인의‘전사’라는 시가 붙어있었다. 이광웅 시인은 내가 재수할 때 학원에서 잠깐 국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조용하고 점잖은 분이었는데, 나중에 투쟁 경력을 알고 놀랐었다. 이 두 개의 시는 좋든 싫든 매일 보아야 했다. 그리고, 운동에 대한 결의가 높아질수록 삶의 좌표로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전사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분 일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을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김남주시인의 시는 활동가들을 무섭게 다그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치고 힘든 활동가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투쟁을 이야기하였다. 진짜 활동가만이 쓸 수 있는 시였다. 그래서, 그의 많은 시어들이 노랫말이 되어 널리 불리어졌다. 자유, 저 창살에 햇살이,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노래(죽창가)가 30년이 다 되도록 지금까지도 널리 불려지고 있다.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누어 흘리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 겉으로는 자유여 민주주의여 동포여 외쳐 대면서도 /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제 자신을 속이고서
 <저 창살에 햇살이 >
내가 손을 내밀면 /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 내가 볼을 내밀면 /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 자꾸자꾸 자라나 /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 내 목에 와서 감기면 /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 그녀와 주고 받고는 했던 /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서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노래(죽창가)>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 꽃이 되자 하네 꽃이 /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 새가 되자 하네 새가 /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에는 /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 불이 되자 하네 불이 /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 다시 한번 이 고을은 / 반란이 되자 하네 /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4. 민족시인 김남주?

몇 년 전, 함께 활동하던 동지가 해남이 고향이어서 여름에 휴가차 해남을 방문하였다. 해남은 땅끝마을로 잘 알려져 관광객들이 많고, 관광지도 잘 개발되어있다. 하지만, 모든 관광지를 제치고, 나를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김남주시인의 생가였다.

광주망월동묘역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묘비에는 「민족시인 김남주의 묘」라는 묘비명이 새겨져있다. 하지만, 이 묘비명은 마흔아홉해동안 살았던 김남주의 삶과 이상을 곡해하고 있다. 김남주시인은 그 스스로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약칭, 남민전) 조직원이었을 뿐 아니라, 자본가들의 재산을 털어 혁명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혜성단 단원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혁명을 계급투쟁으로 규정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사회학적으로 대중을 말할 때 그것은 근로대중 일반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적인 관점에서 대중을 말할 때는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것은 계급으로서의 집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다름 아닌 계급투쟁이기 때문입니다.”-<시와 혁명, 21>.
김남주시인은 자주 민주 통일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져야 하고, 착취가 사라지는 사회의 실현과 연관하여 김남주는 다른 중요한 민족문제를 풀어나가려 하였다. 김남주는 통일에 있어서도 여타의 민족주의자들과 다른 견해를 명확히 밝힌다. 김남주는 무조건적 통일이 아닌,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는 통일이 오히려 분단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중략)… 통일이 안 되어도 좋으니/ 천년만년 남남북녀로 갈라져 살아도 좋으니/ 겨레의 마지막 순결 너 백두산 기슭이여/ 자본의 유혹 앞에서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지 말아라/ 너 금강산 일만이천봉 민족의 기상이여/ 자본의 위험 앞에서 무릎을 꿇지 말아라<겨레의 마지막 순결 너 백두산 기슭이여>.”

이제, 김남주시인을 민족시인으로 가두지 않고, 그 삶과 이상에 맞는 명확한 호칭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민중혁명전사 김남주 시인”이 어떨지?

5. 김남주시인은 우리에게 뭐라 하고 있는가?

운동만을 생각하며 순수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은 생이 짧은 것 같다. 쉬지 않고 일하면 과로사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 분들의 공백이 더 크고, 그 분들의 죽음이 애절하고 안타깝다. 암흑 같은 수구보수세력의 집권이 10년만에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끝장나고, 자유주의 세력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들은 또다시 자본의 이윤창출에만 목을 매고 있다. 노동자민중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삶은 자본의 늪으로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가끔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할 때, 먼저 가신 열사들에게 묻곤 한다. 김남주 시인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당부할까? 시인이 박노해를 지칭하며 쓴 글로 김남주 시인의 당부를 갈음하고자 한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자기 세계를 보지 않으면,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노래하거나 현장에서의 애환을‘묘사’하는 시들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박노해씨 같은 분의 시도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을 여실히 묘사는 했으나 계급적 ․ 정치적으로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이는 우리 노동운동의 한계이기도 하고, 시인들의 한계이기도 하겠지요 노동자들은 근로 조건이자 노동력의 가격을 흥정하는 데 지쳐 노동해방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은 절대 경제주의의 울타리에 갇혀서도 안되고 경제주의에 굴복해서도 안되며, 정치투쟁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시와 혁명, 233∼234>

박노해씨가 출소한 후 은둔한 채 글을 쓰기만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시인의 통찰력이 얼마나 깊은지 감탄을 아니 할 수 없다. 결국, 김남주 시인은 노동자의 투쟁만이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출구로 여겼다. 어떻게 답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김남주의 생애
김남주 시인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중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혁명시인’이었다.
1946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삼화초등학교, 해남중을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3선개헌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시 ‘진혼과’ 등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등을 결성하고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구속되었으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0년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남긴 시 가운데 300여편이 옥중에서 쓴 시로, 그의 옥중시는 80년대 한국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1988년 1월 가석방되어 출소한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 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작고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불과 마흔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군이 있다. 2000년 5월 20일 광주 중외공원에 민족시인 김남주 시비가 건립되었고 묘비에는 “온 몸을 불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의 무기’ 등이 있고, 옥중 서한집으로는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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